이중섭의 예술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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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이중섭의 예술의 세계

by #ㅁⓐ± 2023. 4. 27.

이중섭은 20세기 대한민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불행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사후에야 그 진가를 인정받아 작품이 고가에 거래되는 예술가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중섭의 삶과 작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중섭은 20세기 대한민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특히 소를 많이 그려 한국적인 미를 탁월하게 표현했습니다. 

황소
이중섭 그림

유년 시절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부유한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상당히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며, 5살 때이던 1920년, 부친 이희주가 세상을 떠났지만, 친가와 외가 모두 엄청난 부자여서 경제적인 부족함은 없었습니다. 1923년, 평양 외가로 이주한 뒤 평양 공립종로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25년, 동기 김병기의 아버지 김찬영의 작업실을 출입하며, 각종 화구와 '더 스튜디오 (The Studio)' 같은 유명 미술서적을 접하고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1930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습니다.

 

유학 시절

1931년, 오산학교의 미술교사로 부임한 임용련에게 미술지도를 받았습니다. 임용련은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왔으며, 그의 "조선 사람은 조선 화풍으로 그려야 한다"라는 연설에 이중섭은 깊게 감명받았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적인 미를 추구하고, 서명을 할 때 항상 풀어쓰기로 서명을 한 것이 임용련의 영향이라는 평이 많습니다.

 

실제로 이중섭의 작품들을 잘 보면 한켠에 ‘ㅈㅜㅇㅅㅓㅂ’이라고 풀어 쓴 서명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1933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일본에서는 분카가쿠인 (文化学院) 미술과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했습니다. 이중섭은 일본에서도 한국적인 소재와 색채를 고집하며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1936년, 분카가쿠인에서 졸업하고 돌아왔습니다.

 

전쟁 말기

1937년, 자유미술협회전에서 태양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이중섭의 데뷔작으로 평가되며, 그의 작품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8년, 제주도 서귀포시에 거주하던 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했습니다. 마사코는 일본인 여성으로, 이중섭의 작품을 좋아하던 팬이었습니다. 이중섭은 마사코와 결혼한 후에도 한국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며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1941년, 미술창작 작가협회전에 출품한 소와 여인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 작품은 이중섭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되며, 소와 여인이 조화롭게 배치된 구도와 따뜻한 색감이 인상적입니다. 1942년, 제주도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 이영섭과 함께 서울로 이주했습니다. 1944년, 둘째 아들 이영호가 태어났습니다.

 

공산 치하

1945년, 광복 이후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자신의 집안이 너무 부유한 나머지 자본가 계층으로 몰려 탄압받았습니다. 1946년, 남한으로 내려오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1947년, 평양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나, 공산당의 감시와 탄압으로 인해 작품활동이 어려워졌습니다. 1948년, 남한으로 내려오기 위해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중섭은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 6.25 전쟁이 발발하여 가족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한국 전쟁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으로 내려오기 위해 피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길이 막혀서 평양에서 강원도 원주까지만 도착했습니다. 원주에서는 김홍도의 후손인 김영수의 도움을 받아 작품활동을 계속했습니다. 1951년, 제주도 서귀포시로 이주하여 이중섭 박물관이 되는 집에 거주하였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소와 여인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가족 이별

1952년, 일본에 있는 가족과 통신이 단절되었습니다. 이중섭은 가족을 그리워하며 은박지에 은지화를 즐겨 그렸습니다. 은지화에서는 새와 닭, 물고기와 게 등 자신의 가족을 의인화하거나 가족과 함께했던 제주 시절을 표현하기 위한 단골 소재를 사용했습니다. 또한 같은 구도를 다른 기법으로 반복적으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중섭은 이런 작품들을 일본에 있는 두 아들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애절한 그리움

1953년, 한국 전쟁이 종전되고 서울로 이주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연필화와 엽서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이때 작업한 작품들은 이중섭의 전성기를 여는 밑거름이 되었고, 1956년 생을 마감하기 전에 그린 풍경화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1954년, 일본에서 돌아온 가족과 재회했습니다. 그러나 가족과의 재회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55년, 마사코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중섭은 마사코의 죽음에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외로운 죽음

1956년,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간암으로 인해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39세의 나이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친구들과 지인들이 도와주었고,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이중섭은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과 애절함을 담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사후에 회고전이 열리고 점차 인지도가 높아졌습니다. 현재는 박수근과 함께 대한민국의 확고한 '국민화가'로서 인식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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